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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칼럼] 그 많던 허리는 다 어디로 갔을까

“경력직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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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가 있는 업계 단톡 방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이런 소식이 올라온다. 심지어 그 중에는 이미 한 두 달 전에 이미 올라왔었던 포지션도 있다. 기업들 입장에선 그야말로 비상 시국이다. 팀장을 만나든, 대표를 만나든 하는 말은 하나같이 다 똑같다. 

허리가 없어허리가.” 

 확실히 그런 것 같다. 최근 직장을 이탈한 나 역시도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상사로부터 네가 우리 회사의 든든한 기둥이 되어야지!’라는 말을 들었으니까그 말에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직장 생활을 한지 8년차가 되었던 어느 날의 일이었다. 

 

 사실은 이렇게 30대 중반의 나이에 이직 아닌 퇴사를 할 생각은 없었다. 직장을 다니면서 스스로의 은퇴 시점에 대해 고민해본 적도 없었고,
그저 막연하게그래도 한 40대까지는 회사 생활을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정도였다그런 내가 불과 세 달 전, 예정에도 없던 퇴사를 하기로 결심한 원인은 바로 상사와의 면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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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는 회사 생활에서 괴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물리적, 정신적 역량에 비해 너무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오고 있었다. 얼마 전 퇴사한 동료의 업무를 떠안은 데다, 신규 프로젝트 담당자로 지정되어 매일매일이 정신없이 바빴다. 어떤 날은 전혀 다른 장소에서 열리는 두 개의 회의 참석자 명단에 내 이름이 동시에 들어가 있는 경우도 있었다. 결국 나는 고충을 토로하고 해결책을 찾고 싶어서 상사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내가 있는 회사는 체계가 유연하지 못해서, 이런 상황에서 내게 금전적으로 보상을 해줄 수도 없었고, 직급을 올려줄 수도 없었다. 대신 상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이 시기가 힘들겠지만, 잘 버티고 성장하면 네가 나중에 우리 회사의 기둥이 될 거야.”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어떤 이야기를 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일주일 뒤, 나는 상사에게 퇴사를 통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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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정도의 연차를 가진 직원을 회사에서는 ‘허리’라고 부른다. 그러나 위에서 내려오는 중력과 밑에서 올라오는 충격을 묵묵히 받아내는 허리의 슬픔은 애초에 너무도 당연한 거라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묵묵히 허리 생활을 하다 보면, 정말 영광된 날이 올까?

나의 상사가 내게 제시한 비전은 어쩌면 상사 본인이 살아왔던 삶이었다. 회사에서 열심히 존버하여, 머리는 아닌 팔뚝 정도로는 올라간 삶. 문제는, 내게는 그러한 삶에 대한 동경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괴로워하며 내 몸을 갈아 넣어서 성장통을 겪고, 조직 내에서 조금 더 위쪽으로 상승하면, 나는 내 삶을 내 뜻대로 영위할 수 있게 되나? 그저 지금보다 조금 더 숙련된 직장인이 될 뿐 아닌가? 그때 가서 주어지는 ‘최고의 직장인’으로서의 명예가 내게 어떤 기쁨과 행복을 줄까?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내 답은 회의적이었다.

그렇기에 ‘네가 우리 회사의 허리야’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전혀 기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요즘에는 나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다. 누군가의 육신을 받치는 허리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앞으로 어찌되든 조직을 이탈하여 내가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는 ‘머리’가 되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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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지금의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창 회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허리들이 허리의 역할을 거부하고 있다. 경력직 공고는 넘쳐나고, 허리를 구하지 못해 안달내는 회사는 많은데 정작 머리가 되기로 결심한 허리들은 다시 허리의 위치로 돌아가지 않으려 한다.

대신 그들은 도전한다. 재테크에, 유튜버에, 스마트스토어 부업에, 사이드 프로젝트에… 그렇게 조금씩 ‘자신만의 것’을 쌓아가는 그들은 더 이상 허리에서 존버하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런 그들의 심리는 이해하지 못한 채, 회사라는 조직이 지금처럼 ‘너희도 우리처럼 팀장 달고 임원 달려면 존버해!’라는 메시지만 던져댄다면 수 년 내로 웬만한 회사들에는 고위 직급과 1,2년차 신입들만 존재하게 되지 않을까.

조직의 허리를 이탈한 뒤 작은 머리가 되어버린 내가 앞으로 내가 뭘 해서 먹고 살아갈 수 있을지 아직은 불투명하다. 그렇지만 가능한 한 조직 생활만큼은 다시는 하지 않을 예정이다. 당장 내일의 내 삶이 어떻게 될지, 다음 달의 내가 뭘 하고 있을지 전혀 예상할 수 없지만 그래도 괜찮다.
무엇이 다가오든, 그것을 마주하는 나는 허리도, 팔뚝도 아닌 머리일 테니까
.

 책키라이터 : 설인하 

<돈이 있었는데요없었습니다저자 / Geek Wor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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